창작/잡글

필봉산 추억

나무입문 2019. 9. 25. 16:17

왼쪽이 필봉산, 오른쪽이 강구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초가을에 서너 명의 친구와 함께 해발 848미터의 필봉산(筆峰山)을 처음 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보이는 산, 소 먹이러 가서 아득히 올려다보는 산, 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산이었다. 이름처럼 산의 생김새가 붓끝을 닮았다.

우리는 라면과 냄비도 챙겼다. 우리 동네에서 필봉산을 가려면 먼저 그 옆에 있는 강구산을 타야 한다. 도치바우(도끼바위)에 이르기 전 비탈진 산에 거대한 몸을 박은 바위가 나타났고, 그 바위 한쪽에 파인 고랑으로 맑은 물이 찰찰 흘러내리는데, 가재가 마른 바위 위에 나와 가을 햇볕을 쬐며 얼쩡거리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강구산 중턱에 이르자 샘이 나왔다. 그토록 경사가 급한 곳에도 무릎을 꿇고 소처럼 입을 대어 물을 마실 수 있는 샘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거기서 돌을 주워 냄비를 걸고 나뭇가지를 때어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한 번 산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아찔했다. 그러고 또 올랐다. 오르는 내내 산도 신천지요, 산 아래도 신천지였다. 빨갛게 익은 볼똥을 한 움큼 훑어 입에 털어 넣는 재미도 있었다. “강구산 꼭대기에는 볼똥 천지란다. 번번하게 깔려 있다더라.” 이런 얘기도 주고받았다.

강구산 능선이 끝나고 드디어 필봉산. 바위 코스에서는 거미나 도마뱀처럼 기어서 올랐다. 도중에 짐승들에게 반쯤 뜯어먹힌 돼지머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무당이 산신령에게 제를 올린 모양이었다.

필봉산 정상에 섰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슴에 벅찼다. 띠처럼 꼬불꼬불 난 신작로를 따라 양버들 고목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 그 사이로 휴대용 성냥갑보다 작은 버스 한 대가 꽁무니에 먼지를 일으키며 천천히 달린다. 신작로는 양버들 가로수와 함께 시냇물처럼 흐르다가 다른 신작로를 만나 삼거리를 이룬다. 골짝마다 작은 마을과 마을, 경호강이 멀리 돌아 나가고 그 건너는 산청 읍내다. 또 거기서 진주 쪽으로 달리는 신작로와 산들.

‘학교 선생들이 견문 견문 하더니, 이런 게 바로 견문 아이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생각한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나무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이웃 동네 어른을 만났다.
“너그들, 어디 갔다 오노?”
“필봉산에 올라갔다 오는 길입니더.”
“너그들이 어찌 거기 가노?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라예!”
“거짓말하지 마라!”
높아만 보이던 산을 올라가 보았다는 뿌듯함이 시들해졌다. 마음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어른은 다 이렇나? 아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분명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어른은 필봉산 높은 줄만 알았지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산을 올랐던 아무개는 진주 도회지로 이사를 갔다. 그것이 우리가 헤어지기 전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아무개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함께했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필봉산을 오르면 본 웅석봉, 바물티(밤머리재) 방향
산청 읍내 방향. 경호강이 흘러 진주 남강으로 간다. 지금 경호강을 남강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움푹 꺼진 곳이 바물티(밤머리재)다. 바물티를 넘으면 삼장 대원사가 나온다.
저 먼 골짜기 인가가 있는 곳이 오비(오봉)다. 어릴 적 오비 골짜기, 오비 골짜기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오비에서 면 소재지 우리 동네의 지서로 사환 일을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가장 멀리 가운데 M자로 솟은 봉우리 중 왼쪽이 지리산 천왕봉이다.
필봉산 정상석
정상 부근 산딸나무 (꽃이 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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