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머루
학명 : Vitis flexuosa Thunb.
분류 : 포도과 포도속
형태 : 낙엽 활엽 덩굴나무
암수 : 암수딴그루
개화 : 5월 하순
결실 : 9~10월
머루는 산에서 얻을 수 있는 별미의 과일이다. 지천으로 널린 것도 아니고, 아주 귀한 것도 아니다. 주로 산골짜기와 계곡의 비탈, 산기슭, 숲 가장자리 등 햇빛이 적당히 들면서 물 빠짐이 좋은 습한 곳에서 머루 덩굴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가을에 머루 덩굴을 발견했으나 머루를 따지 못하는 경우는 셋 중 하나다. 먼저 발견한 동물 또는 사람이 이미 거두었거나,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그루이거나, 생식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직 어린 나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발이 타지 않은 산속을 찾아 헤맨다면 머루를 얻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 비해 얻는 양은 조금이다. 있으면 맛을 보고 없어도 그만이라 여겨져 온 것이 머루 아닐까.
사람들이 머루라고 부르는 나무에는 왕머루, 머루, 섬머루, 새머루, 까마귀머루, 청까마귀머루가 있다. 왕머루, 머루, 섬머루는 원형 또는 넓은 달걀꼴 잎이 3~5개로 ‘얕게’ 갈라지는데, 이 셋은 잎 뒷면의 털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왕머루는 털이 없고, 머루는 갈색 털이 덮였고, 섬머루는 갈색 털이 덮였다가 없어진다. 까마귀머루와 청까마귀머루의 잎은 3~5개로 ‘깊게’ 갈라지고, 그 갈라진 잎이 ‘얕게’ 갈라진다. 이 둘은 잎 뒷면의 털로 구분한다. 흰 털이 덮인 것은 까마귀머루, 맥 위에만 털이 있는 것은 청까마귀머루다.
새머루는 잎이 심장형으로, 얕게 갈라진 것도 나오지만 대부분 갈라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삼각형 잎을 한 덩굴성[蔓性] 식물이라는 뜻으로 산카쿠즈루, 즉 삼각만(三角蔓)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갈류포도(葛藟葡萄)라 하고, ≪시경≫에 “남쪽에 가지 늘어진 나무(南有樛木) / 갈류가 잡고 오르네(葛藟纍之)”라든가 “길게 이어진 갈류(緜緜葛藟) / 하수 물가에 있네(在河之滸)”라고 한 그 갈류를 새머루로 본다. 또 타이완에서는 잎 표면에 광택이 난다고 광엽포도(光葉葡萄)라 한다. 확실히 새머루 잎은 다른 머루보다 광택이 난다. 잎 가장자리에는 깊지 않은 톱니가 있고, 잎끝은 뾰족하며(점첨두), 잎밑은 대개 심장형으로 움푹 들어가고(심장저) 더러 평평하다(절저).
포도・머루・개머루・담쟁이덩굴 등 포도과 식물의 잎차례는 어긋나기를 하고, 그중 포도・머루・왕머루・새머루 등 포도속 식물은 덩굴손이 마디의 잎과 마주나는데, 여기에는 규칙이 있다. 새머루를 비롯한 머루 종과 유라시아 포도(Vitis Vinifera)는 덩굴손이 2회 연속으로 마디에 나고 그다음 마디에서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덩굴손이 마디에서 ‘유-유-무’를 반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새머루는 머루・왕머루・까마귀머루와 달리 꽃자루에 덩굴손이 나는 경우가 드물다.
새머루를 비롯한 모든 머루는 암수딴그루로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다. 꽃은 잎 맞은편에 원뿔꽃차례로 핀다. 암꽃은 수술대가 짧은 퇴화한 수술 5개와 씨방이 도도록한 암술 1개를 지녔고, 수꽃은 수술대가 긴 수술 5개를 지녔다. 꽃봉오리 상태에서 꽃술을 싸고 있던 5개의 황록색 꽃잎은 꽃이 피자마자 일찌감치 떨어져 나간다. 꽃받침은 원반처럼 생겼다.
포도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는 이 머루가 포도를 대신했다. 1398년 음력 9월, 당시로서는 나이가 많은 64세의 태조 이성계는 병까지 들어 수정포도(청포도)가 먹고 싶었다. 수정포도를 구하기 전 우선 급한 대로 경력(經歷) 김정준이 서리 맞아 반쯤 익은 산포도를 한 상자 바치니 크게 기뻐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쓰여 있다. 이 산포도는 머루 중에서 가장 흔한 왕머루일 것이다. 새머루는 그다음으로 흔하다. 모든 머루 종의 대명사가 된 머루(V. coignetiae)는 울릉도나 제주도에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막상 흔하지 않다.
머루는 객지에서 사는 사람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야생 과일이자 나무 이름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ᄃᆞ래랑 먹고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고려 가요 <청산별곡>에도 나오지만, 머루(멀위)는 산골 마을이나 외진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들인다. 산에서 뛰어놀고, 소를 먹이고, 꼴을 베던 아이들이 운 좋게 따 먹던 향수 어린 열매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 밤하늘을 사랑했다.” 박목월은 <사투리>에서 머루와 오디가 까맣게 익던 고향 경주를 그리워한다. “이것은 고향에서 나는 과일인데(此是故山物) / 네가 어디에서 구했단 말이냐(汝從何處求) / 맛을 보니 메마른 가슴 적셔져(嘗來潤枯肺) / 객지의 시름 줄어드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頓覺減羈愁)”. 지금은 경남 거창과 함양 안의(安義)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진 안음(安陰)이 고향인,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은 <하인이 산포도를 올리다(同奴進山葡萄)>에서 이렇게 감탄했다.
옛날 시골 아이들은 산에서 머루를 발견하면 익지 않은 시퍼런 것도 따 먹곤 했다. 그러나 풋머루는 몇 송이 못 먹는다. 금세 혀와 입술이 까슬하고 아리다. 이것은 익지 않은 머루, 포도, 다래, 키위, 토마토, 파인애플 등에 많은 옥살산칼슘(calcium oxalate)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뾰족한 옥살산칼슘의 결정이 신경세포를 찌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일들은 잘 익은 것을 먹어야 한다. 덜 익었으면 적절한 시간 동안 두어 익히는 후숙 처리가 필요하다.
새머루라는 이름에는 일반 머루와 다르다는 의미가 있다. 식물 이름에 새(鳥), 개, 뱀 따위의 접두어가 붙으면 기준이 되는 식물보다 못하거나 다른 것을 말한다. 새머루는 새나 먹을, 머루보다 못한 머루가 아니라 단지 머루와 잎이 다르다는 뜻을 지녔다고 본다. 모든 면에서 머루나 왕머루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머루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산의 옛말이 ᄆᆞㄹㄹ(말), ᄆᆞᄅᆞ(마라) 등인데, 이것에서 파생되어 그 열매를 가리키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산의 마루, 사람의 머리도 우뚝 솟은 산꼭대기를 뜻하는 이 말에서 나왔다. 머루는 ‘산에서 나는 먹을 만한 열매’를 뜻할 것이다. 멀귀, 멀위, 머뤼를 거쳐 오늘날의 머루가 되었다. 멀귀는 조선 시대 문헌에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옛 전통이 남아 있는 오지 함경도와 만주에서 쓰이는 사실로 미루어 멀위 이전의 말은 멀귀였다고 본다. 함흥이 고향인 소설가 한설야의 작품 <탑>에도 머루가 함경도 토속어 멀귀로 쓰여 있다.
머루의 한자 표기는 포도가 들어오기 전과 후가 다르다. 포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욱(薁), 영욱(蘡薁), 영자(蘡子), 갈류(葛藟) 등이 쓰였다. 蘡薁은 영먹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본초강목≫에는 嬰郁(영욱)이라 읽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산포도, 야포도라는 말은 한・중・일 삼국이 서역에서 들어온 포도를 보고 뒤늦게 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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