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나무

포도와 머루

나무입문 2019. 8. 23. 19:51

포도와 머루의 가장 큰 차이는 열매 크기다. 포도는 크고 머루는 작다. 인간 손에 개량되기 전의 야생 포도도 머루보다 컸다. 또 다른 차이라면 포도나무는 암수한꽃을 피우는 암수한그루이고 머루는 암수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라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오랜 세월 과수로 재배되면서 암꽃을 피우는 암나무만이 살아남았다. 원래 포도나무에 암나무와 수나무가 있었지만, 인간에게 꽃만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는 필요 없었다. 포도나무 번식은 굳이 파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꺾꽂이나 휘묻이로 하면 그만이다.

포도나무는 인간이라는 생물에게 자주권을 침해당했다. 스스로 번식할 기회를 인간이 박탈했다. 포도나무 암나무는 오랫동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했다. 다른 생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후대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꺾꽂이 등을 통해 인간에게 미래를 맡긴다면 어느 날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때 자신들도 멸종을 피할 길 없다.

포도나무 암나무는 인간의 경작지에 강제로 이주당해 살아가며 수나무의 생식 능력을 갖고자 했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 부실하나마 꽃에 수술을 갖고 있었다. 그 수술이 제대로 기능하게 하면 된다. 그리하여 짧았던 수술이 길게 늘어났고 그 끝의 꽃가루에 정핵을 갖게 되었다.

사실일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 바람과 상상으로 버무린 것에 불과하다. 좀 더 사실에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분명 야생 포도에는 수꽃만 피우는 수나무와 수술이 퇴화한 암나무가 있었고, 그 가운데 암수한꽃을 피우는 개체가 간혹 나왔다. 유전 형질이 되물림되는 돌연변이 포도나무였다. 식물은 씨앗이 들지 않은 열매를 굳이 건사할 필요가 없다. 씨앗은 새 생명체를 낳고, 그 생명체가 또 자라 땅에 씨앗을 뿌린다. 식물은 씨앗이 만들어질 때 풍부한 과육으로 그 씨앗을 지원한다. 씨앗이 들어 있지 않은 씨방은 과육으로 성장하는 듯하다가 땅에 떨어진다. 식물이 조금 자란 열매를 스스로 버려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포도알이 맺혀 굵게 자라려면 꽃에 씨방을 지닌 암나무뿐만 아니라 씨방 속에 씨를 맺히게 하는 수나무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다. 암나무에 맺히는 포도를 따 먹기 위해 수나무까지 함께 키우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땅도 더 필요했다. 그러다가 암수갖춘꽃을 피우는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그 나무에 열리는 포도에는 씨앗이 들어 있었다. 포도나무는 씨앗을 다른 곳에 퍼뜨려달라며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에게 달콤한 포도 과육을 선사했다.

포도나무가 암수갖춘꽃, 즉 암수한꽃을 피우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야생 포도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였다. 인간이 암수한꽃을 피우는 포도나무만 재배한 탓에 오늘날 암수딴그루의 포도나무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와 달리 머루는 암수딴그루다. 암꽃을 피우는 암나무, 수꽃을 피우는 수나무가 따로 있다. 산에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달리지 않은 머루를 본다면 그 덩굴나무는 수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암나무 혼자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그 경우 열매가 아주 부실하다. 기다란 송이에 머루가 고작 한두 개 달린다. 그나마 눈물 겨운 노력 끝에 거둔 결실이다. 머루 암꽃을 보면 암술 주위에 보잘것없는 수술이 5개 있다. 실제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가임신이라 생각된다. 한두 개 열매가 맺혔고 그 안에 씨앗이 들었으나, 씨눈(배, )이 없는 씨앗일 뿐이다. 당연히 그 씨앗은 발아하지 못할 것이다.

외진 산골짝에 홀로 살아가며 멀리 사랑을 찾는 머루 신세보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포도 신세가 나은지도 모르겠다. 

포도꽃. 가운데 암술(암술머리, 암술대, 씨방)이 있고 그 둘레에 수술이 5개 있다.
어린 포도
거의 다 익은 포도


머루 수나무의 수꽃
머루(새머루) 암나무의 암꽃
머루 암꽃 상세. 씨방 둘레에 헛수술이 보인다.
머루 풋열매
머루(새머루) 익은 열매. 수나무 없이 암나무 혼자 열매를 맺었지만 부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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