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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나무입문 2019. 12. 9. 10:33

천왕봉에서 반야봉 쪽으로의 조망. 멀리 우뚝한 봉우리가 반야봉이다.

유두류록(遊頭流錄)

_ 점필재 김종직

 

[일러두기] 옛 한문은 ‘…한데’, ‘…하니’라고 옮길 수밖에 없는 게 많이 나옵니다. 그런 글이 잇따를 때는 하나의 문장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또 글이 잘 읽히도록 약간 다듬었음을 밝혀 둡니다. 원문의 뜻과 정신은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 자기의 겸칭)는 영남에서 나고 자랐으니 두류산(頭流山)은 바로 내 고향 산인데, 남북으로 나아가 벼슬하며 세속에 골몰해 나이 사십이 넘도록 아직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노라. 신묘년(辛卯年, 1471) 봄에 관직을 받아 함양에 내려갔더니 두류산이 그 경계 안에 매우 높고 우뚝하면서 싱싱하게 푸른 모습으로 있어 눈만 들면 다 보였지만, 흉년에 백성의 일과 서류 처리에 바빠 거의 이 년 동안 또 감히 유람 한 번 할 수 없었으니! (‘유람 한 번이 두 차례 나오는 것으로 김종직의 간절한 바람을 알 수 있다. 옮긴이) 매번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며 마음에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올해 여름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에서 나에게 와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이 되어 장차 양친이 계신 집에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을 유람하기 청했다. 나도 생각해보니 파리함이 날로 더하고 다리의 힘이 더욱 약해지는 터라 올해 유람하지 못하면 내년은 어려울 것 같았다.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추석이라 음침한 흙비가 이미 개어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구경하며 즐기고, 닭이 울 때 일출을 보고, 다음 날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구경한다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으니 마침내 유람하기로 했다.

이에 극기에게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서 말한 산행 도구를 준비하게 했다. 그 휴대하는 것에서는 더하고 뺌이 약간 있었다. 음력 814일 무인일(戊寅日)에 덕봉사(德峯寺) 승려 해공(解空)이 와 길을 이끌게 했고,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청했다.

마침내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쉴 때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와 도착했다. 법종에게 두류산을 다니며 겪은 바를 물어보니 길의 막힘과 꺾임이 자못 상세했다. 그 또한 우리를 인도하게 해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길이 갈림길이었다. 거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미투리를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오르는데, 숲 골짜기가 깊어 벌써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 리를 나아가자 환희대(歡喜臺)라 하는 바위가 있었다. 태허와 백원은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환희대는 아래가 천 길일 만큼 높은데, 거기에서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여러 사찰이 굽어보였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는 가파른 낭떠러지를 등지고 지어져 있었다. 낭떠러지 밑에 있는 두 샘의 물은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서는 이지러지고 갈라진 반쪽짜리 바위에서 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물은 조금 파인 반석에 맑게 고였고, 그 반석 틈에 난 오리나무와 비짜루는 모두 몇 치 크기였다.

선열암 옆에는 너덜겅 길이 있어 등 덩굴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놓고, 그 줄을 더위잡고 오르내려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로 왕래했다.

법종이 말했다.

이곳에 한 비구승이 있었는데,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마친 뒤 구름처럼 돌아다녀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결하: 음력 416일 또는 516일에 시작하는 여름 안거. 우란: 우란분. 여름 안거의 끝 날인 음력 715일 전후로 행하는 사흘간의 공양. 옮긴이)

돌 위쪽에는 오이와 무를 심어놓았고, 작은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 몇 되쯤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에도 승려는 없었다. 그 암자 또한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갈래로 늘어섰는데[五條離立], 높이가 모두 천여 척이었다.

법종이 말했다.

듣기로, 한 부인이 있어 바위 사이에 돌을 쌓고 혼자 그 안에 기거하면서 도를 닦아 하늘로 올라갔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과연 돌을 쌓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독녀암 기슭에는 잣나무가 나 있었다. 그 바위를 오르려는 사람은 나무에 의지해 잣나무를 끌어당겨 잡고 바위 문기둥을 돌아 감으면서 등과 배가 모두 문질러지는 것을 감수한 뒤에야 꼭대기에 이른다. 그러나 목숨을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올라갈 수 없었다. 구실아치인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쉽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우리를 손짓해 불렀다.

내 일찍이 산음(山陰, 산청의 옛 지명)으로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모든 봉우리 모서리가 튀어나와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에야 나 자신이 이곳에 걸터앉으니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해져 내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점차 서쪽으로 비스듬히 나아가 고열암(古涅菴)에 이르니 날이 벌써 어둑해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산등성이에 있었다. 극기 등은 뒤에 남았고, 나 혼자 지팡이에 의지한 채 삼반석(三盤石) 위에 서서 보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陁峯)이 모두 다리 아래에 있었다.

해공이 말했다.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어 노숙(老宿)과 우타(優陁)가 그곳에 기거하면서 일찍이 삼열승(선열암, 신열암, 고열암의 승려 옮긴이)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소승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삼반석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잠시 뒤 납의(衲衣)를 입은 고열암 주승이 와서 합장하며 말했다.

듣자 하니 사군(使君)이 와서 유람한다는데, 어디 있습니까?”

해공이 주승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눈짓하자 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내가 장자의 말을 빌려 위로해 말했다.

나는 불을 쬐는 사람들이 아궁이를 다투고, 여관에 묵은 사람들이 자리를 다투게 하고 싶네. 지금 주승은 한 시골 늙은이를 보았을 뿐 어찌 모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 장자의 말이란, 장자(莊子)우언(寓言) 편에 나오는 노자와 양자거의 일화를 말한다. 노자는 대백약욕(大白若辱, 크게 깨끗한 사람은 더러운 것처럼 보여야 하고), 성덕약부족(盛德若不足, 덕이 많은 사람은 덕이 부족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을 이야기하며 양자거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었다. 양자거가 태도를 고치자 사자피석(舍者避席, 여관 손님들이 자리를 피한다), 양자피조(煬者避竈, 불을 쬐는 사람들이 아궁이를 피한다)가 사자여지쟁석(舍者與之爭席, 그와 함께 여관 손님들이 자리다툼을 벌이게 되었다)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옮긴이 ]

그러자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날 나는 처음으로 험한 일을 겪어 거의 이십 리를 걸었다. 극도로 지치고 고단해 깊이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나 보니 달빛이 구름에 삼켜지거니 토해지거니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일었다. 나는 말 없이 걱정할 따름이었다.

기묘일(음력 815), 여명은 구름에 가려 한결 어두웠다.

주승이 말했다.

빈도(貧道, 승려가 자기를 가리키는 겸칭)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지냈는데, 구름으로 헤아려보니 오늘 틀림없이 비가 오지 않습니다.”

나는 기뻐하며 짐꾼을 줄여 그 짐꾼의 일부를 돌려보냈다.

고열암을 나와 곧장 푸른 등()이 잔뜩 우거진 곳을 가는 도중에 저절로 죽은 큰 나무가 마른 시냇가 좁은 길에 쓰러져 얼추 외나무다리가 되어 있었다. 반쯤 썩은 나무는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틴 채 마치 말이 가는 것 같았는데, 가지를 헤치고 그 아래로 지나갔다.

첫 번째 산등성이에서 해공이 말했다.

이곳은 구롱(九隴)의 제일입니다.” [ 구롱은 구선계(九仙界)를 염두에 둔 표현이자 통칭(統稱)이다. 신선의 땅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홉 곳 나온다는 것이다. 옮긴이 ]

서너 횟수가 이어져 한 동부(洞府)에 이르렀는데, 널찍하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이 해를 가리고, 덩굴식물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류가 돌에 닿아 굽이지고 꺾이며 소리를 냈다. [ 동부는 신선이 산다고 하는 곳 중의 하나다. 중국 양나라 심약(沈約)선관비(善館碑)’에서 유래했다. “아홉 선계는 매우 멀고 아득한데, 등급이 들쭉날쭉하다. 어떤 신선은 동부에 모습을 감추고, 어떤 신선은 영악에 살고자 한다. (九仙緬邈 等級參差 或藏形洞府 或棲志靈岳)” 옮긴이 ]

그 동쪽은 산 등마루이지만 아주 험준하지는 않았고, 그 서쪽은 지형이 점점 낮아지는데 이십 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약 닭과 개, 소와 송아지를 끌고 들어와, 벌목하고 밭으로 개간해 기장, 찰벼, , 콩을 심는다면 무릉도원에도 크게 뒤질 것이 없었다.

나는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고 극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 어찌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을 약속하고 이곳에서 노닐 수 있겠는가?”

그런 뒤 그를 시켜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적게 했다.

구롱의 아홉 번째에 이른 뒤 바로 등마루를 거쳐 갈 때는 구름이 낮게 대삿갓을 스치고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초목이 축축이 젖어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남쪽으로 산등성이를 몇 리 돌지 않아 진주 땅이 보인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해 보니 그 집 지붕을 판자로 올렸다. 우리 네 사람은 각자 청이당 앞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잠시 쉬었다.

이곳부터 영랑재(永郞岾)까지는 길이 매우 위태해 정말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신발 아래를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는데, 나무뿌리를 더위잡아야 비로소 오르내릴 수 있었다. [ 봉선의기: 한나라 때 마제백(馬第伯)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례를 위해 태산(泰山)에 올랐을 때의 산행기. 옮긴이 ]

날이 이미 정오를 넘어서야 비로소 재에 올랐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여기에 와서는 도리어 천왕봉을 우러러본다. 영랑(永郞)이란 자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삼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를 즐겁게 유람하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소년대(少年臺)는 영랑재 봉우리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이다. 이른바 소년이란 영랑의 무리를 가리킬 것이다. 돌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살펴보던 나는 꼭 추락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따르는 자들에게는 절벽 언저리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일렀다.

그때 구름과 안개가 흩어져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치자 산 동서 계곡이 확 트였다. 그곳을 바라보았더니 잡목은 없고 모두 구상나무, 전나무, 소나무, 녹나무였는데, 뼈만 남아 말라죽은 나무가 삼분의 일을 차지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여 꼭 그림 같았다.

그 산 등마루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리고 구부러진 데다 구름 같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는 잣나무가 아주 많아 이곳 사람들이 가을마다 잣을 채취해 공물 액수를 채우는데, 올해는 잣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다 채워 거두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하겠습니까? 수령이 마침 보았으니, 이는 참으로 다행입니다.”

여기에는 맥문동과 비슷한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며 매끄러워 깔고서 앉거나 누울 만했는데, 곳곳이 다 그러했다. 청이당 밑으로는 오미자가 우거진 숲이 많았지만, 이곳에 이르러서는 오미자는 없고 단지 독활과 당귀가 보일 뿐이었다.

해유령(蠏踰嶺)을 지나는 길에는 곁에 배처럼 생긴 선암(船巖)이 있었다.

법종이 말했다.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차올랐을 때 배가 이 바위에 매여 있었는데, 방해(螃蠏, )가 이 바위를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말이 확실하다면 그때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붙잡고 살았단 말인가?”

또 등마루 남쪽을 따라 중봉(中峯)에 올랐더니 산속에 융기해 봉우리인 것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오직 이 봉우리만이 흙을 이고서 단정하고 정중하기에 걷기가 수월했다.

거기에서 약간 아래로 걸어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었다. 마암에는 맑고 찬 샘이 있어 마실 만했다.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 마구 뛰고 돌아다니게 하면 반드시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린다. 내가 지난해와 올여름에 사람을 보내 그것을 시험해보았더니 꽤 효과가 있었다.

신시(오후 3~5)에야 비로소 천왕봉에 올랐다. 그러나 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어 산천이 모두 어두웠고 중봉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聖母) 사당에 나아가 작은 불상을 받들고 운무가 걷히기를 큰 소리로 빌며 그 불상을 희롱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을 해공과 법종에게 물었더니 속인들이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손을 씻고 옷차림을 바르게 한 뒤 돌계단으로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성모에게 올리고 고했다.

모는 일찍이 공자가 태산(泰山)에 올라 경치를 구경한 것과 한자[韓子, 당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를 높여 부르는 이름. 옮긴이]가 형산(衡山)으로 유람한 뜻을 사모해왔으나 직무와 관련한 일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번 추석에 남쪽 고을에서 농사를 살피다가 몹시 험한 산봉우리를 우러러 그리워하며 온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마침내 진사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모두 구름사다리에 올라 사당 밑에 당도했는데, 병예(屛翳, 풍신의 이름)가 빌미가 되어 구름이 잔뜩 일어나 황급하고 매우 답답하며, 좋은 때를 저버릴까 염려됩니다.

성모께 엎드려 비오니, 이 형작(泂酌, 제주)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적으로 보답해주소서. [ 형작은 시경(詩經)의 대아편 <형작>에서 나온 말로, 제사에 올리는 술을 뜻한다. 泂酌彼行潦(형작피행료, 멀리 저 길에 고인 물을 떠서)로 시작하는 시 형작에는 제주를 마련하기 위해 물을 긷고, 고두밥을 짓고, 술독과 술병을 씻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옮긴이 ]

오늘 저녁 온 하늘이 텅 비어 달빛이 낮과 같고, 내일 아침 만 리가 환히 트여 산과 바다가 자연히 구분되게 해주신다면, 저희는 빼어난 경관을 얻으니 어찌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서는 여럿이 함께 신위 앞에 앉아 몇 순배 술을 마시고 파했다.

사당집은 겨우 세 칸으로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인데, 그 집 또한 판잣집에 못을 박아 매우 튼튼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위로 들려버린다.

일찍이 두 승려가 있어 성모 사당 벽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른바 성모의 옛 석상이다. 눈썹과 눈, 쪽 찐 머리는 모두 칠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고, 목에는 그어진 자국이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태조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와 싸워 승리한 해에, 왜구가 이 산봉우리에 올라 찍고 갔기에 훗사람이 풀을 발라 거기를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당 밖 동쪽 구석으로 움푹 들어간 돌 보루에는 해공 등이 희롱했던 작은 불상이 있어 이를 국사(國師)라 부르는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탕한 남자[淫夫]라고 전해온다.

또다시 내가 성모는 세속에서 어떤 신이라 일컫는가?” 하고 물으니,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입니다.”라고 했다.

, 이렇구나! 서쪽 천축(인도)과 동쪽 우리나라는 수많은 세계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카필라국)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도선(道詵)에게 명했다.”의 주석에 지금 지리산 천왕,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했다.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 설화를 익히 듣고서 그 임금의 혈통을 신격화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승휴는 그것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승려 무리가 세상을 환혹(幻惑)하는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라! 아울러 처음부터 마야부인이라고 하면서 국사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그 무엇이 이보다 더 무례하고 거만하며 불경스럽겠는가. 이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풍(陰風)이 심하게 와닿는데, 동서로 사납게 불어 그 기세가 집을 뽑아버리고 큰 산을 흔들 것 같았으며, 이내와 안개가 모여들어 의관(衣冠)이 축축이 다 젖었다.

네 사람 모두 성모 사당 안에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워 있자니 한기가 뼈에 사무쳐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따르는 자들은 모두 다리를 덜덜 떨며 도()를 잃어 큰 나무 서너 개를 불태워 따뜻하게 하라고 일렀다.

밤이 깊어 달빛이 어두침침하게나마 비치자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보았으나, 갑자기 두꺼운 구름에 가려져버렸다. 보루에 의지해 사방을 내려다보니, 육합(六合, 하늘ㆍ땅ㆍ동ㆍ서ㆍ남ㆍ북 옮긴이)이 서로 이어져 마치 큰 바다 한가운데에서 작은 배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하면서 파도 속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세 사람에게 웃으며 말했다.

비록 나에게는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낌새를 알아차리는 도술은 없지만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우주의 원기를 거느리고 혼돈의 근원에 떠다니게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 퇴지는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당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의 자(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 ‘한퇴지의 정성이란 한유가 중국 오악(五嶽) 중 하나인 형산(衡山)에 올랐을 때 산허리에 운무가 자욱했는데, 형악묘(衡嶽廟, 형산 사당)에서 산신에게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자 곧 날이 갠 것을 말한다. 옮긴이 ]

경진일(음력 816), 비바람이 여전히 드세어 따르는 자들을 먼저 향적사(香積寺)로 보내 밥을 차려놓고 지름길을 헤쳐 와 우리 네 사람을 맞이하게 했다. 정오가 지나 비가 조금 그쳤는데 돌다리가 매우 미끄러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해 내려왔다.

몇 리를 나아가니 쇠사슬 길이 있어 매우 위태했는데, 곧 석혈(石穴)을 통과해 나와 있는 힘을 다해 걸어 향적사에 뛰어들었다.

승려가 거처하지 않은 지 벌써 이 년이 된 향적사에는 골짜기 물이 여전히 나무 홈통에 의지해 물통에 졸졸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들창의 자물쇠나 향 쟁반의 기름이 모두 멀쩡했다.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피우게 한 뒤 그곳에 들어가 머물렀다.

땅거미가 졌을 때 운무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어 내려왔다. 운무의 빠르기는 일별(一瞥)도 용납되지 않을 정도였고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비치는 곳도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며 문 앞 반석으로 나와 바라보니 마름으로 덮인 내[]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가 하면, 여러 산과 해도(海島)가 어떤 것은 다 드러나고, 어떤 것은 반쯤 드러나고, 어떤 것은 꼭대기가 드러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듯했다. 산꼭대기 주변에는 봉우리가 중중첩첩해 어제 걸었던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성모 사당 곁의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휘날렸다. 화승이 매달아 놓은 깃발은 그곳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남북 양 바위를 마음대로 구경하고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이때 동쪽이 아주 깨끗하게 맑지는 않았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나뭇등걸과 마들가리로 불을 지피게 해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에는 별과 달이 밝았다.

신사일(음력 817), 새벽에 해가 먼 산에서 떠올라 노을 색에 광채가 났다. 좌우 모두는 내가 극도로 지쳤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왕봉을 다시 못 오를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며칠 동안 계속된 궂은비가 갑자기 이처럼 갠 것은 하늘이 우리를 많이 대접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지금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굳게 힘쓰지 않는다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끝내 그 응어리를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해 먹은 다음 바지를 걷어 올리고 곧장 석문(石門)을 지나 올라갔다. 발에 밟히는 초목에는 얼음이 서려 있었다.

성모 사당에 들어가 다시 제사를 지내고 사례해 고했다.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습니다. 실로 신의 보살핌에 힘입어 참으로 크게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곧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로 올라가는데, 그때 태허는 벌써 판잣집 위쪽에 올라가 있었다.

설령 큰기러기와 고니가 높이 난다고 해도 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이때 날이 새롭게 다시 개어 사방에는 잔 구름 하나 없었고, 하늘은 매우 푸르고 아득할 뿐 끝난 곳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말했다.

무릇 멀리 보면서도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이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 , 서 순서로, 또 가까운 곳부터 보고 먼 곳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러자 해공이 그 요령을 지시하는 것이 자못 능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 남원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나 반야봉(般若峯)이 되었고, 동쪽으로부터는 약 이백 리를 잇닿아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힘차게 우뚝 솟아 북쪽으로 빙 두르며 마쳤다. 그 사면의 지봉(支峯)들과 갈래 진 골짜기들은 우뚝함을 겨루고 흐름을 다투는데, 아무리 셈을 잘한다 해도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살펴보니, 그 성가퀴가 마치 끌어서 두른 듯한 것은 함양의 성일 터이고, 청색과 황색이 마구 섞인 가운데 흰 무지개가 가로지른 것은 진주의 강물일 터이고, 푸른 다슬기가 점점이 이어지고 가로지르며 우뚝 선 것들은 남해 거제의 군도일 터이다. 이곳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 등의 현은 모두 산의 옷주름에 숨어 볼 수 없었다.

이 산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산은 황석산(안음), 취암산(함양)이고, 먼 산은 덕유산(함음), 계룡산(공주), 주우산(금산), 수도산(지례), 가야산(성주)이다. 동북쪽으로 가까운 산은 황산(산음), 감악산(삼가)이고, 먼 산은 팔공산(대구), 청량산(안동)이다. 동쪽으로 가까운 산은 도굴산(의령), 집현산(진주)이고, 먼 산은 비슬산(현풍), 운문산(청도), 원적산(양산)이다. 동남쪽으로 가까운 산은 와룡산(사천)이다. 남쪽으로 가까운 산은 병요산(하동), 백운산(광양)이다. 서남쪽으로 먼 산은 팔전산(흥양)이다. 서쪽으로 가까운 산은 황산(운봉)이고, 먼 산은 무등산(광주), 변산(부안), 금성산(나주), 위봉산(고산), 모악산(전주), 월출산(영암)이다. 서북쪽으로 먼 산은 성수산(장수)이다.

어떤 산은 언덕 같고, 어떤 산은 용과 호랑이 같고, 어떤 산은 음식을 늘어놓은 것 같고, 어떤 산은 칼끝 같은데, 오직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보다 약간 크고 높게 보였다. 계립령 북쪽으로는 옥색 기운이 하늘에 넘치고 대마도 남쪽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았는데, 시계(視界)가 이미 다해 더는 또렷하게 볼 수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게 했다. 그것은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는 가운데 내가 자축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이 봉우리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 우리처럼 즐거웠겠는가.”

보루를 내려와 너덜겅 길에 이르렀다. 그곳 돌에 걸터앉아 술을 몇 잔 마시고 나니 날이 벌써 정오였다. 거기에서 영신사(靈神寺)와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있었다.

재빨리 석문을 통과해 내려와 중산(中山, 현재의 제석봉. 옮긴이)에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고을 사람들 중에 엄천을 거쳐 오르는 자들은 북쪽 제이봉을 중산이라 생각하는데, 마천에서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재의 시루봉. 옮긴이)을 제일봉으로 생각하고 이 봉우리는 제이봉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또한 중산이라고 부른다.

여기부터는 쭉 산등성이를 거쳐 갔다. 도중에 나타나는 기이한 봉우리는 십여 개로, 그 모두 올라가 조망할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엇비슷했으나 명칭이 없었다.

극기가 말했다.

선생께서 손수 그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무징불신(無徵不信)에 따르면 어떻겠나?” [ 무징불신: 증거가 없으니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출전은 예기(禮記)중용(中庸)이다. “上焉者 雖善無徵 無徵不信 不信民弗從 (상언자 수선무징 무징불신 불신민부종). 위에 있는 사람은 비록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증거가 없고, 증거가 없으니 믿지 않게 되고, 믿지 않는 백성은 따르지 않게 된다.” 옮긴이 ]

숲에는 마가목이 많아 지팡이로 삼을 만했다. 따르는 자들을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 취하게 했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채웠다.

증봉(시루봉)을 지나 습지 평원에 이르렀을 때 길을 마주한 단풍나무가 있었는데, 문틀 모양으로 굽었기에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고개를 숙이거나 등을 구부리지 않았다.

평원은 등마루에 있는데도 오륙 리쯤 편평하게 트여 수풀이 우거졌고 샘물이 휘돌아 흘러가 농사지어 먹고살 만했다. 계류 위쪽에 몇 칸 되는 초막이 보였다. 섶나무 울타리를 둘렀고 흙구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병영(兵營)에서 매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산과 언덕 곳곳에 매 잡는 도구가 설치된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때 가을 기운이 아직 높지 않아 매를 포획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매는 은하 사이를 날아다니는 동물이다. 어찌 높고 가파른 땅에 위장한 덫을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 알겠는가. 미끼를 보고 욕심을 부리다가 갑자기 새그물에 걸리고 줄과 고리에 제압당하니 역시 사람을 경계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저 매의 진헌(進献)은 고작 한두 마리에 불과한데, 놀이를 충족하기 위해 메추라기 옷차림으로 한 끼 저녁밥을 먹는 자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바람을 견뎌가며 천 길 산봉우리 꼭대기에 엎드려 숨어 있게 하는 것은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다.

해가 질 무렵에 오른 창불대(唱佛臺)는 깎아지른 듯 매우 험준했다. 그 밑은 보이지 않았다. 그 위는 나무와 풀이 없고 다만 몇 떨기 철쭉이 자라며 영양이 똥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두원곶, 여수곶, 섬진강 물굽이를 굽어보는데,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더욱 기이했다.

해공이 골짜기들이 만나는 곳을 가리키며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했다. 절도사 이극균(李克均)은 이곳에서 호남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싸웠다. 장영기는 개나 쥐와 같은 자로, 험한 지세(地勢)를 업고 싸웠기에 이 공이 지혜롭고 용맹했어도 그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장흥 수령의 공이 되었으니 이는 탄식할 만하다. [ 1469년 성종 즉위년에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이극균이 전라도 도적 장영기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장흥에서 전라도 병마 절도사 허종(許琮)의 지휘 아래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이 장영기를 사로잡은 일을 말한다. 옮긴이 ]

해공이 악양현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학사동(靑鶴寺洞)입니다.”

, 이 오래된 곳을 신선의 영역이라 일컫는구나! 청학사동은 사람 사는 고을과 아주 멀지는 않은데, 이인로는 무엇을 근거로 그곳을 찾다가 못 찾았는가. [ 고려 명종 때의 학자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아 안주코자 했으나 못 찾고 돌아간 일을 말하고 있다. 옮긴이 ] 청학사동은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이름을 그리워해 절을 꾸며내고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또 해공이 그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쌍계사동(雙溪寺洞)입니다.”

일찍이 이곳에 최치원이 유람했으니 그와 관련한 석각(石刻)이 남아 있을 것이다. 최치원은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기상과 절개를 자부하는 터에 난세를 만나 중국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흔쾌히 세상 물정 바깥으로 물러나 깊고 고요한 계곡과 산을 두루 돌아다녔으니, 최치원은 세상 사람들이 신선이라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영신사에서 하룻밤 묵는데, 그곳에는 단지 한 사람의 승려만 있었다. 절 북쪽 언덕에는 마하가섭(摩訶迦葉) 석상이 하나 있고, 세조대왕 때는 이곳에 매번 내시를 보내 향을 내렸다. 그 가섭 석상 목에도 흠집이 있었다. 이 또한 왜구가 찍은 것이라 한다.

, 왜구는 정말 흉악한 구적(寇賊)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마구 죽이고, 성모상과 가섭상의 머리 또한 끊어지고 베어졌으니, 비록 무딘 듯한 돌이지만 사람 형상을 본떴기 때문에 환난(患難)을 만난 게 아니겠는가!

가섭상 오른팔 팔뚝에 불에 탄 듯한 흔적은 겁화(劫火)에 탄 것으로 조금만 더 타면 미륵 세상이 된다고 한다. 저 돌의 흔적은 본디 이러했으나, 바로 허황하고 괴상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내세에 이익을 보려는 자들로 하여금 돈과 베로 보시를 다투게 하니 진실로 가증하다.

가섭전(迦葉殿) 북쪽 봉우리에는 우뚝 선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이른바 좌고대다. 그 하나는 밑이 둥글게 서렸고 위가 뾰족한데, 머리에 인 네모진 돌의 넓이가 겨우 한 척이었다.

중들은 그 위에서 예불하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따르는 자들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썩 잘 올라가 절을 했다. 내가 절에 있다가 멀리 그것을 보고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 꾸짖어 그만두게 했다. 이들은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운데도 이처럼 쉽게 목숨을 스스로 판단하니, 중이 백성을 속일 수 있음은 이를 들어 알 수 있다.

영신사 법당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을 그린 그림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 위에 써 놓은 찬()은 이렇다.

 

마하가섭은 곧 두수(抖擻)에 정진해 (頭陁第一 是爲抖擻)

밖으로 티끌을 멀리하고 안으로 때를 떨쳤네. (外已遠塵 內已離垢)

앞서 득도하고 뒤에 입멸했으니 (得道居先 入滅於後)

눈 덮인 계족산(鷄足山)은 천추에 영원하리. (雪衣雞山 千秋不朽)

 

[ 두타(頭陁)란 번뇌와 탐욕을 버리고 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하는데, 석가모니 제자 가운데 마하가섭이 두타에 가장 뛰어나 두타제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두수(抖擻)는 두타와 같은 말이다. 계족산(鷄足山)은 가섭이 입적한 인도의 산이다. 옮긴이 ]

그 곁에는 소전체(小篆體)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는데, 이는 곧 안평대군의 삼절(三絶)이었다. [ 안평대군은 시문, 서예, 그림 세 가지에 뛰어났다. 몽산화상을 그린 그림, 시와 글씨 모두는 안평대군 작품으로 추측된다. 옮긴이 ]

영신사 법당 동쪽 섬돌 아래에 있는 영계(靈溪), 서쪽 섬돌 아래에 있는 옥천(玉泉)은 물맛이 아주 좋았다. 이것으로 차를 끓이면 중국 중령천(中泠泉)과 혜산천(惠山泉)도 비슷했으면 비슷했지 더 뛰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샘 서쪽에는 부서진 절이 높이 솟아 우뚝한데, 이것은 옛 영신사다. 그 서북쪽 깎아지른 봉우리에 돌의 결이 곱고 매끄러운 작은 탑이 있었다. 이 또한 왜구가 쓰러뜨린 것을 뒤에 다시 쌓고 철심으로 중앙을 꿰었지만 몇 층은 유실되고 말았다.

임오일(음력 818),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섬진강에 조수(潮水)가 넘치는 광경을 보았다. 물끄러미 응시하고 보니 그것은 바로 편평하게 펼쳐진 이내였다.

밥을 먹고 난 뒤 절의 서북쪽으로 물러나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般若峯)을 바라보았다. 그곳과의 거리는 육십 리쯤 되어 보였다. 비록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두 발이 모두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해 억지로 그럴 수 없었다. ‘곧장 곧게 가리키는 대로 내려가는데 [徑由直旨而下]’, 길이 점점 매우 위태해져 나무뿌리를 꽉 붙잡고 돌 모서리 밟기를 수십 리,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 徑由直旨而下(경유직지이하): 여기에서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를 뜻한다. ‘경유하다라고 할 때의 그 으로 보면 안 된다. 경유의 한자어는 길 경 자를 쓴 經由. 비록 지름길 경()이 길 경()과 통하기는 하지만 경유한다는 의미로 쓸 때는 經由라고 적는다. ‘~에 의거하다는 뜻이다. 直旨, 곧게 가리킴에 의거해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가리킬 지)와 통한다는 사실은 불가에서 직지심체요절의 직지를 直指直旨 두 가지로 써온 점, 直旨寺라는 절 이름에서 直旨直指心體要節 혹은 直旨心體要節의 그 직지를 가리킨다는 점, 17세기에 조경남이 쓴 속잡록(續雜錄)白氣一道 起自暈傍 直旨艮方 移時乃滅(백기일도 기자훈방 직지간방 치시내멸, 흰 기운 한 줄기가 햇무리 곁에서 일어나 간방을 곧게 가리키더니 나중에 사라졌다)”는 대목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옮긴이 ]

내려가는 도중에 동쪽을 마주하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마치 지척인 것 같았다. 대나무 가지 끝에 열매가 간혹 달려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사람들이 채취해 갔다. 백 아름이 될 법한 소나무 거목들이 골짜기 바위 사이에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모두 평상시에 못 보던 것이었다.

험한 곳을 다 내려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두 산골짜기의 물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소리는 뿜어져 퍼지면서 산기슭의 수풀을 마구 흔들었다. 수심 백 척의 맑은 소()에서는 물고기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손으로 물을 움켜 이를 헹군 뒤 물가를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골짜기 초입 당집 앞에서는 하인이 미리 말을 데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당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이르렀을 때 노인 몇 사람이 길 아랫자리에서 맞이해 절을 하며 말했다.

사군께서 산을 유람하며 무양(無恙)하셨으니 감히 축하드립니다.”

비로소 나는 일을 폐하고 한가롭게 유람한 것으로 백성들이 나를 탓하지 않아 기뻤다.

승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승려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에 놀러 갔다. 나는 바로 등귀재(登龜岾)를 넘어 곧장 관아로 돌아왔다.

유람에 나선 지 겨우 닷새 만에 생각, 정신, 외모가 넓고 크고 쓸쓸해진 것을 갑자기 깨달았으니, 처자와 구실아치들이 나를 볼 때도 지난날과 같지 않으리라.

! 이처럼 두류산은 높고 웅장하고 경치가 빼어난데, 중원에 있었으면 반드시 숭산(嵩山)과 태산(太山)에 앞서 천자가 봉선(封禪,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 옮긴이)을 위해 올라 궤에 봉해진, 금가루로 쓴 제문을 상제에게 고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무이산(武夷山)과 형산(衡山)에 견주고,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하기로는 한유(韓愈), 주자(朱子), 채원정(蔡元定) 같은 사람들이, 수련의 방면으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 같은 사람들이 이 산속에 잇따라 의거하고 노닐고 깃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단지 용렬한 사내, 도망친 노비, 신분을 숨기는 자, 부처를 배우는 자 들의 소굴이 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 비록 한 번이나마 등람(登覽)해 겨우 평소 소원을 풀었지만, 승묵(繩墨, 지켜야 할 법도)에 바빠 감히 청학사동을 탐방하고 오대(五臺)를 돌아다니면서 그윽함과 기이함을 두루 밝히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운이겠는가!

두보의 방장삼한(方丈三韓) 시구를 길게 읊으니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정신과 혼은 아뜩할 정도로 높이 난다. [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 이십운(奉贈太常張卿 二十韻)>방장산은 삼한 밖에 있고(方丈三韓外) 곤륜산은 만국 서쪽에 있네(崑崙萬國西)라는 구절이 있다. 김종직은 이 시에 나오는 방장산(方丈山)이 두류산, 즉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암시하고 있다. 옮긴이 ]

 

임진년(1472) 추석으로부터 닷새 지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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